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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재단, 단군왕검을 이은 태자 부루(太子 扶婁)의 존재성과 동부여 해부

본부 2016-03-10 15:06:55 조회수 1,406

고조선단군학 제33집 2015.12. 5-31쪽 (한국연구재단 등재 저널) 

단군왕검을 이은 태자 부루(太子 扶婁)의 존재성과 동부여 해부루와의 구분 

문치웅 김은진 

Ⅰ. 서론 
Ⅱ. 창수사자 태자 부루 
Ⅲ. 태자 부루와 동부여의 해부루의 구분 
3.1 태자 부루와 동부여 해부루의 혼동 
3.2 태자 부루와 해부루의 구분 
Ⅳ. 결론 
참고문헌 

【 국문요약 】 

본 연구에서는 왕검조선의 단군왕검을 이은 태자 부루의 존재에 대해 다루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단군의 역년 중에 있었던 특정 사건까지의 기간이 1500년 또는 1048년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긴 역년에도 불구하고 단군왕검 이후의 단군에 대한 인물 정보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태자 부루의 존재는 한 명의 단군에 의해 1500년의 넘는 기간 동안 이어졌다고 해석하는 신화적 접근의 틀을 깨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중국 후한(後漢)대에 조엽이 저술한 『오월춘추』를 시작으로 당(唐), 명(明), 청(淸)대의 문헌들인 『당송백공육첩』, 『고미서』, 『繹史』 등에서 창수사자로 칭해진 태자 부루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또한 한국의 문헌들을 통해서도 태자 부루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태자 부루와 관련한 이들 문헌의 공통점은 모두 치수사업의 내용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자 부루와 관련한 기록에서 시간적으로 2000여년 이상 차이가 나는 동부여 해부루와 혼동한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 발생의 원인은 부루라는 이름으로 인해 부여의 해부루가 왕검조선의 태자 부루로 잘못 이해되면서 발생된 문제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 과정에서 『壇君記』라는 인용 문헌을 통해 북부여 때에도 왕을 단군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제왕의 이칭으로서 단군이라는 명칭은 왕검조선뿐만 아니라 북부여에서도 사용되었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며, 단군이 여러 명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태자 부루와 동부여 해부루의 혼동에 대한 문헌의 내용들을 관련 문헌의 통합적인 분석을 통해 그 구분을 명확히 하였다. 
이러한 단군왕검 이후의 인물의 존재와 단군이 帝와 王의 이칭이라는 것은 왕검조선이 1908년 이상 이어진 긴 역년을 가진 고대국가로서의 역사성 확립을 위한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중국 문헌에서의 창수사장 태자 부루의 기술은 왕검조선의 역사성에 신뢰감을 더해준다. 

주제어 : 태자 부루, 해부루, 왕검조선, 단군왕검, 동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