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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니시 류(今西龍)의 고조선 연구와 문제점

조원진 2022-09-15 08:29:40 조회수 1,747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한국사 연구는 한국고대사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마니시는 檀君과 箕子 등 고조선과 관련된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으며 그의 연구는 후대 일본학계의 고조선 인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보다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마니시가 단군을 부정하며 ‘王儉’이 평양의 옛지명인 ‘王險’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거나 단군을 해모수라고 본 것은 큰 오류가 있다. 『三國遺事』의 사례처럼 본래 고조선의 도읍 명칭은 壇君王儉과 관련된 王儉城이 맞는 표기로 보인다. 또한 단군은 해모수와 동일인이 아니다. 이마니시는 단군 전승에서 불교적 요소가 적으며 구조를 보면 字句 상에 도교적 요소가 많다고 했으나 그가 언급한 도교적 요소는 단군 전승의 원형이 아니라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표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마니시가 기자 동래를 부정한 것은 한국학계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마니시는 기자 동래를 부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환의 『魏略』은 樂浪 韓氏의 僞系譜에 근거한 기록으로 보고 『魏略』의 사료적 가치도 불신하였다. 그러나 일부 윤색된 부분이 있더라도 『魏略』의 사료적 가치와 『魏略』에 나오는 고조선 왕들의 역사성까지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마니시는 기원전 3세기 이전 고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기자가 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조선과 이후의 위만조선은 성격이나 강역이 다르다고 보았다. 즉 전자는 한강(옛 대수) 유역을 중심으로 한 韓種族의 나라이고 후자는 대동강(열수)를 중심으로 한 중국민족(支那民族)의 나라라고 본 것이다. 또한 진번을 충청도와 전라북도로, 진국을 경상도로 각각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조선의 주민 구성과 진번ㆍ진국의 위치 비정은 오늘날 근거를 상실한 견해이다.

고조선의 존속기간과 영역을 축소하고 한사군의 위치를 최대한 한반도 남쪽으로 비정하려 했던 이마니시의 주장은 문헌ㆍ고고학 자료를 통해 볼 때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주제어] 이마니시 류, 단군, 기자, 고조선, 단군조선, 왕검조선, 기자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