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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역사문제 e-Conference 고대한일교류 l 홍익재단

본부 2022-04-05 11:04:53 조회수 7,722

한일역사문제 e-Conference


·링크주소http://hongikf.org/sub/sub03_02.php?p_idx=14

·Youtube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W7DupNx5uv6k4G66tTqYdBJJn4MzCdkh 

·주관 ‧ 주최: 홍익재단 (http://www.hongikf.org) 


고대한일교류




1. 장신구로 본 왜와 고대 한반도의 교섭사-5세기6세기 전반 규슈(九州)지역을 사례로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박사(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고훈시대(古墳時代) 중기 이후의 5,6세기 왜의 유력자들은 귀금속으로 만든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신라백제대가야에서 보낸 것과, 그것을왜풍(倭風)으로 변형한 것이었다. 5, 6세기에는 철()과 금속공예(金工), 스에키(須恵器), 기마(騎馬) 등 다양한 문화가 한반도로부터 왜로 유입되었다. 왜 각지의 유력자들은 한반도 여러 사회와 정치경제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안정적으로 선진 문화를 도입할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그 실력을 표상한 것이 바로 귀금속 장신구였다.

특히 5, 6세기 규슈(九州)지역에는 장신구를 착용하면서 왜 왕권의 외교활동에 참여했던 상위 유력자나 지역사회의 주체적 교섭을 실제로 담당했던 중간급 유력자 등이 존재하였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실체)을 분명히 함으로써 당시의 역동적인 한일관계의 실체를 알 수 있다.

 

2. 고대 일본과 한국의 문자문화 - 동국의 비석을 중심으로 l 하시모토 시게루(橋本繁)교수 (경북대)

 

고대일본의 문화는 한반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 출토된 논어(論語)나 천자문을 적은 목간(木簡) 중에는 한국의 논어목간과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막대기 형태(棒状)의 목간에 쓴 것들이 있다.

고대일본의 동국(東国)에 남아있는 비석의 형태들을 보면,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 것들이 있다. 이러한 비석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6세기 신라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사각 기둥모양의 비석 본체에 장식이 없는 입석(笠石)을 얹은 것은 [진흥왕순수비]와 매우 유사하다. 비문의 내용에 당()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에 정주(定住)한 신라에서 온 도래인의 영향이다. 칠세부모(七世父母)라는 표현은 백제 멸망 후에 제작된 명문과도 공통된다. , 일본어의 순서대로 한자를 나열한 문체는 신라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등과 유사하다.

이처럼 고대일본의 비석에 한반도의 영향이 보이는 배경에는 도래인의 이주가 있었다.

 

3. 고대백제인의 주거:나라분지(奈良盆地)의 대벽건물(大壁建物아오야기 다이스케(青柳泰介) 박사(나라현립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 부속박물관)

 

나라현(奈良県) 내 고훈시대(古墳時代)고대의 한반도계 도래요소 중 백제계 건물로 여겨지는 대벽건물(大壁建物)은 도랑()을 사각형(方形)으로 굴착한 후 도랑 안에 기둥()을 촘촘히 배치한 특이한 건물이다. 건축용어로는 기둥이 벽에 매립되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조의 건물을 말한다. 특징이 있는 하부구조로 지역색을 파악하기 쉬운 건물이기도 하다. 일본열도에서는 세기 전반부터는 나라분지(奈良盆地) 남부, 세기 후반부터는 시가현(滋賀県) 오쓰시(大津市) 북부, 세기 후반에서 10세기대에는 동일본에 집중되었으며, 한반도에서는 백제지역, 특히 중심부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이 건물이 확인되는 유적의 성격을 살펴보면 일본열도에서는 관아와(官衙)와 호족거관(豪族居館) 등 지역의 핵심적인 시설이었고, 한반도에서는 백제의 수도 주변 중요시설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백제계 관인과의 관계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고대의 한일관계를 생각하는데 있어 이 건물이 가장 적합할 것으로 생각된다.

 

4. 일본에 건너온 백제왕족과 오사카(大阪)의 유적-백제왕씨(百済王氏)의 우지데라(氏寺)백제사적(百済寺跡)』 l 오오타케 히로유키(大竹弘之) 교수(靑邱考古研究院)

 

663,백촌강에서 백제부흥군이 대패함으로써 의자왕에 의해 왜국에 파견되었던 왕자 선광(禪廣)은 형 풍장(豊璋)과 돌아가야 할 조국을 함께 잃었다. 그래서 톈지천황(天智天皇)에게 나니와(難波)에서의 거주를 허가받았고, 지토(持統)조에는 백제왕(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고 조정에 출사하였다. 이 무렵 조영했던 우지데라(氏寺)가 셋쓰(摂津)의 백제사(芝廃寺)와백제니사(百済尼寺)였다.

선광의 증손인 백제왕 경복(敬福)은 덴표(天平)21(749) 임지인 무쓰노쿠니(陸奥国)에서 사금(砂金)을 발견하고, 황금 900량을 도다이지(東大寺)의 노사나불(盧舎那仏) 조성에 애를 쓰고 있던 쇼무(聖武)천황에게 헌상하였다. 경복은 그 공으로 말미암아 파격적인 위계 상승을 이루었고, 이후 일족의 처우를 견고하게 다져놓았다. 또한 경복 이후 일족은 무쓰(陸奥)데와(出羽) 등에서의 국사(国司)나 진수부(鎮守府)의 높은 관직으로 임명받는 일이 계속되었다.

간무(桓武),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할 무렵 백제왕씨는 카와치노쿠니(河内国) 가타노(交野)로 이주하여 새로이 交野百済寺를 짓고 있었다. 가타노에서 간무천황의 신임을 얻어 총애를 받은 사람이 경복의 손자인 백제왕 명신(明信)이었다. 간무(桓武)사가(嵯峨) 두 천황의 잦은 가타노 행행(行幸)때마다, 百済寺 일대를 무대로 하여 향응을 베풀었고, 이로 인해 일족은 승진을 거듭하는 한편, 후궁에 자녀를 들여보내 외척으로서의 지위도 굳혔다. 그러나 간무천황이 죽은 후에는 차츰 형세가 예전만 못해졌다.

百済寺跡百済王氏가 가타노로 이주한 이후 활동했던 무대였으며, 성쇠를 함께한 유적이다. 그리고 百濟王神社百済寺跡과 함께 百済王氏의 역사를 현재에까지 전하고 있다.

 

 

5. 교토(京都)남부 야마시로(山城)지역의 한반도 관련 유적과 유물 고대의 사원을 중심으로 l 히시다 데쓰오(菱田哲郎) 교수(교토부립대학)

 

교토(京都) 남부의 야마시로(山城)지역은 왕권을 구성하는 기나이(畿内)에 포함되어 왜국(倭国)의 국가형성 단계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사람들의 흔적들 또한 다른 기나이 여러지역과 마찬가지로 많이 확인되었다. 특히, 우지시가이(宇治市街)유적과 모리가이토(森垣外)유적은 5세기부터의 현저한 도래계 유구(遺構)와 유물이 있어, 왕권의 거점 주변에 기술과 지식을 갖춘 도래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에 불교가 백제로부터 전파되었고, 그 후 아스카데라(飛鳥寺)의 조영부터 본격적인 사찰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교토(京都) 남부의 야마시로(山城)지역은 7세기 전반부터 사원이 지어진 지역 중 한 곳으로, 오늘날까지 법통(法統)을 전하는 고류지(広隆寺)를 비롯하여 고찰(古刹)들이 탄생해왔다. 그 배경에는 이 땅에 정착한 도래인 하타씨(秦氏)의 활약이 있었는데 특히 신라와의 외교 등에서도 활약했음이 유적과 유물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남야마시로(南山城)지역에는 고마(コマ)라는 지명 이외에도, 고구려와의 관계를 말해주는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데, 옛날에 고구려 사절단이 지나간 루트와도 관련된 역사적 배경이 깔려있다. 야마시로지역에는 이후 나가오카쿄(長岡京), 헤이안쿄(平安京)의 도성이 성립하는데, 그 기반이 된 것은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사람들이 뿌리내린 기술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