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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 관학자들의 단군신화의 불가조작설과 그 비판

선석열 2022-06-20 13:35:24 조회수 2,373


 

*이 논문은 홍익재단의 연구비 지원으로 수행된 연구결과임.


본고는 20세기를 전후하여 일본인 관학자들이 제기한 단군신화의 불가조작설에 대해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들은 일선동조론을 내세우기 위한 목적 아래, 단군이 일본 상고의 신 소전명존이라는 주장이었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비판도 있었지만, 이는 단군의 존재를 왜곡한 것이다. 다음 일본인 관학자들의 불가조작설은 한국의 유교사가조차 단군신화를 황탄하여 믿을 수 없다고 말한 점에 가탁하여 조작의 시기, 조작의 주체로서 불교 승려 일연을 들었다. 일본인 학자들은 단군신화에 대해, 중국 역사서에 보이지 않는 점과 조선의 유교사가가 한

국 고대의 여러 신화를 황탄하여 믿을 수 없다는 점에 가탁하여 부정하였다. 특히 那珂通世는 단군의 王儉은 평양의 옛 이름인 王險의 ‘險’자를 인편(人扁)[‘儉’]으로 조작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 달리 중국 사서에는 차자표기법을 적용하여 왕험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인칭인 왕검과 지명인 왕험은 표기한 것이며 조작은 아니다. 이는 王儉의 ‘王’은 국왕을 의미하는 ‘임금’의 훈독으로써 표기한 것이고, ‘儉’은 임금의 ‘금’을 음독으로써 표기한 것이며, 고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왕검은 인칭으로서 임금이라는 의미였다. 즉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왕검’이었으며, 임금이 거

처하는 왕성은 ‘왕험성’으로 표기하였다. 다시 말하면 위만 등장 이전에 이미 왕검의 존재가 전해지고 있었으며, 이후 한국에서는 불가 외에 유교사가들에 의해 인지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임금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 단군신화는 고조선 건국 당시에 인식된 것이며, 이는 고려시대의 승려가 단군신화를 날조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주제어]

단군신화, 불가조작설, 일연, 차자표기법, 왕검, 임금, 역사적 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