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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인류와 역사문화 e-컨퍼런스] 고고자료가 말해주는 동아시아 세계 속의 한중일 교류

본부 2022-04-04 10:06:56 조회수 1,357

고고인류와 역사문화 e-콘퍼런스



· 게시일: 2022년 4월 1일(금)

· 주관 및 주최 : 재단법인 홍익재단 

· Youtube :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W7DupNx5uv7d32Cb1tCGlEmBYEBOgA6H 




고고자료가 말해주는 동아시아 세계 속의 한중일 교류




1. 가야의 대외교류 - 토기를 중심으로 - 조성원 교수(부경대 박물관) 


최근 밝혀지고 있는 영남지역의 발굴성과는 가야가 한반도를 넘어서 동북아시아 고대사의 한 축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가야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물질자료는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토기는 가장 일상적인 물질자료이면서도 인간의 이동과 교류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가야에 들어온 교류토기는 왜계토기(하지키), 마한·백제계토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4세기대에는 금관가야인 김해·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왜계토기와 마한·백제계토기가 집중된다. 그러나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몰락하자, 교류에 의해 유입되는 토기는 가야 각지로 확산된다. 특히 왜계토기(하지키와 스에키)는 소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어, 왜의 대외교섭창구가 소가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마한·백제계토기는 경계지역인 경호강과 섬진강 일대의 가야 영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가야에서 출토되는 교류토기는 가야의 정치적 흐름과 대외정세에 따라서 출토양상을 달리하고 있으며, 이는 가야의 국제적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騎馬文化の東方拡散(기마문화의 동방확산)諫早直人(이사하야 나오토) 敎授(교토부립대학京都府立大学)


鐙は現代乗馬において欠くことのできない馬具の一つである。しかしながら、その出現時期については、ウマ家畜化や乗馬の開始よりもかなり新しいことが世界各地における考古学の進展により明らかとなっている。起源についてはいまだ未解明の部分もあるが、現代にまでつながる鐙は、いまからおよそ1700年前、西暦300年を前後する頃の中国周辺で発明され、時差をもちながらもユーラシアの東西に広がっていくことがわかっている。本発表で扱う東北アジアの中でも東端に位置する日本列島は、もともと馬という動物自体が棲息していなかったが、西暦400年を前後する頃に家畜馬が本格的に輸入されるのとほぼ同時に鐙を伴う騎乗が確認されている。本発表では東北アジア各地における鐙の出現や、それに伴う騎乗用馬具の変化に注目し、鐙の出現に伴う騎乗の普及が騎馬文化の東方拡散の直接的な契機となったことを明らかにする。また拡散の背景には西晋滅亡と五胡十六国の混乱があること、とりわけ東北アジアにおいては三燕(慕容鮮卑)の直・間接的影響が看取されることを指摘する。 
등자(鐙)는 오늘날 기마의 필수가 되는 마구(馬具)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출현시기에 대해서는 말의 가축화(家畜化)와 기마의 시작보다도 상당히 늦다는 것이 세계 각지에서의 고고학의 진전에 의해 밝혀졌다.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현대에까지 계속된 등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전, 서기 300년을 전후한 무렵 중국에서 발명되어 시차를 두면서 유라시아의 동서로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본 발표에서 다루는 동북아시아 중에서도 동쪽 끝에 위치한 일본열도는 원래 말이라는 동물 자체가 서식하지 않았지만, 서기 400년을 전후한 무렵에 가축말이 본격적으로 수입된 것과 거의 동시에 등자를 동반한 기마가 확인되었다. 본 발표에서는 동북아시아 각지에서의 등자의 출현과 그에 동반한 기마용 마구의 변화에 주목하여, 등자의 출현에 동반한 기마의 보급이 기마문화의 동방확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확산의 배경에는 서진(西晋)멸망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혼란이 있었다는 점, 특히 동북아시아에서는 삼연(三燕, 모용선비)의 직간접적인영향이 확인되었음을 지적하였다. 


3. 繩文時代の日韓交流 - 廣瀬雄一(釜山大)


今から8000年位前に温暖化が東海に暖流と寒流が流れ込み、豊富な漁撈資源が生まれた。新石器時代の人々は 漁撈資源の獲得を生計戦略の一つとした。 隆起文土器においては対馬島が交流において中心的位置にあった。越高浜遺跡からは韓半島南部地域から隆起文土器の段階に渡航集団が営んだ集落とされる。日本列島では見られない方形の炉址が確認されていてる。墓地も確認されていて長期に活動していた事がわかる。韓半島の隆起文土器の集団はクジラ漁をしていた可能性があり、クジラの移動ルートに沿う形で石銛移動して九州西北地域などと共にまで移動したのではないか。長崎県つぐめもはな遺跡からは 韓半島の隆起文土器、石銛、クジラの骨が出土している。約4500年前になると反対に韓半島地域では遠洋漁撈文化が発達してその一部が韓半島南部地域に到達している。土器の交流はクジラ漁で一部継続する。韓半島一部農耕社会へと展開して漁撈文化の接触をとして日本列島にも初期農耕の情報が伝わった。